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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회 오일도 전국백일장, ‘민족의 한을 울컥울컥 시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민족의 한을 울컥울컥 시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를 기리는 전국백일장이 올해도 개최된다. 9월24일 오전10시 시인 오일도의 고향마을인 경북 영양읍 감천리에 소재한‘오일도 시공원’에서 영양문인협회(회장. 오용순) 주최로 열한번째 백일장이 열린다.   초등부와 중등부, 고등부, 대학·일반부 대상으로 한 백일장과 아울러‘문학, 교감의 능력과 따뜻한 상상력’주제로 영남대 국문과 김문주 교수의 문학특강, 청소년들의 시낭송과 장기자랑을 볼 수 있는 청소년문화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즈음에서 오일도의 생애를 보자. 영양이 낳은 불세출의 낭만시인 오일도 그는 누구일까. ------------------------------- 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일도 생가   가을햇살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아직 여름을 잊지못한 늦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뉴스투데이
    • 문화
    2022-09-22
  • (창간특집) 민족의 한(恨)을 울컥울컥 시(詩)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시인 오일도 시비  【정승화 기자】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의 고향 마을인 영양군 입암면 감천리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마을어귀 연꽃풍경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닝 오일도 동상과 시  △오일도 생가 여름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7월의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시인 오일도 생가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오일도 시인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정시인 오일도의 고향 감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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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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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월(日月)칼럼〉 영양양조장의 부활을 보며!
    영양양조장 모습   아우 보래. 이사람 한 평생이러쿵 살아도저러쿵 살아도시큰둥 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렁 저렁그저 살믄 오늘 같이 기계(杞溪)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 베앙 그렁가 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지게 목발 받쳐 놓고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한잔 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그게 다 기막히는 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영양이 낳은 민족시인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시인으로 불리는 시인 박목월(1915~1978)의 ‘기계(杞溪) 장날’ 이란 한편의 주옥같은 시(詩) 전문이다.   박목월의 시 기계장날을 보면 서민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지면 일손을 놓아야 했던 암울했던 농촌지역의 현실. 오일장이 서는 바로 그날 그리운 이들을 만나 모처럼의 회포도 풀고 안부도 묻는 그 시간이 서민들에겐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낙(樂)이었다.   이때 정을 주고받는 통로는 바로 한잔의 술, 걸쭉한 막걸리가 등장함은 당연하다.   요즘처럼 수많은 술이 각양각색으로 나오고, 술집도 천차만별로 이뤄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주전자로 부어마시던 그 막걸리의 힘은 서민들의 삶을 질펀하게 해준 보약같은 존재였다.   이런 막걸리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조한 한국양조의 태동이 바로 경북 영양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맛있는 술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물이 좋아야 한다고 한다. 산 좋고 물 좋은 영양에서 국내 막걸리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영양양조장’의 역사는 무려 104년. 지난해까지 운영돼 오다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닫으면서 한국막걸리의 역사가 멈춰버렸다.   영양양조장이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호흡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영양군의 노력. 정부의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탈바꿈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영양군은 영양읍 동부리 일대  1,438㎡ 부지를 막걸리 제조의 전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다양한 문화상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영양지역 경제의 한축으로 만든다는 복안으로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양조장 재생을 위해 교촌F&B(주)와 업무협약을 맺고 생산이 중단된 영양막걸리를 다시 생산하는 등 생산·관광·체험 3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조성한다고 하니 기대감이 크다.   문향의 고장 영양이 막걸리의 고장으로도 널리 알려지면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 유치에도 큰 호재가 될 것이 아닌가. 죽어가는 영양양조장을 되살린 영양군에 박수를 보낸다.   대도시의 화려한 발전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지역의 천연자원과 오래된 역사유물을 잘 가꾸어 새로운 보석으로 만드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영양양조장의 부활이 그러한 ‘보석가꾸기 작업’으로 봐야한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닌 것이다.   영양양조장이 계획대로 추진돼 일에 지친 우리네 아버지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던 막걸리의 힘과 서민들의 낭만이 되살아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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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7

기획특집 검색결과

  • (창간특집) 민족의 한(恨)을 울컥울컥 시(詩)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시인 오일도 시비  【정승화 기자】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의 고향 마을인 영양군 입암면 감천리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마을어귀 연꽃풍경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닝 오일도 동상과 시  △오일도 생가 여름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7월의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시인 오일도 생가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오일도 시인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정시인 오일도의 고향 감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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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8
  • 〈기획탐방〉영양출신 민족문학사의 거목, 조지훈!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 호은종택     【영양】 정승화 기자=2019년의 봄, 전국적으로 산불이 발생해 온 나라가 화염으로 가득한 듯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가 봄을 맞아 생명의 문을 여는가 싶더니 그 기세가 지나쳐 마침내 불이 되었던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전, 조지훈의 봄은 어땠을까. 그때도 이렇게 불이 났을까. 1920년 일제치하에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온 그에게 봄은 처음부터 겨울이었을 것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봄도 빼앗기고 마음도 잃어버린 그 시절의 조지훈. 그의 발자취를 찾아 백두대간의 산간으로 차를 몰았다.   그를 찾아가는 길은 포항에서 영덕 강구를 거쳐 영덕~상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청송IC에서 내려 약 20분간 들어가면 문향의 고장 영양에 도착한다. 세월이 세상을 바꿔놓았다. 이 산간벽지에 고속도로가 다 놓이다니. 동탁(조지훈의 본명)이 살아있었다면 입을 떡 벌렸을 만큼 상전벽해의 세상이 됐다.     영양으로 가는 길   전국 최고의 청정지역인 영양의 대표 농산물이 ‘영양고추’와 ‘영양사과’ 라면 이를 키운 햇살과 청정솔바람이 뛰어난 문필가들을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문향의 고장 영양’ 이라는 영양군 슬로건이 도로표지판으로 등장한걸 보면 그 출발선에는 바로 조지훈이 있을 것으로 무릇 짐작된다.   영양읍내에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그의 고향 주실마을. 영양 일원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곳에 5백여년동안 선비의 지조를 지쳐온 주실마을이 고풍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때 환란을 피해 정착한 한양 조씨들의 집성촌으로 1630년경 마을이 형성됐는데 하늘에서 내려다 본 마을모습이 마치 배모양을 띠고 있어 주실(主室), 또는 주곡(主谷)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호은종택 입구 모습   이 마을에는 2개의 종택이 있는데 옥천종택(玉川宗宅)과 호은종택(壺隱宗宅)이다. 옥천종택은 조선 숙종 17년(1671)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와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의 집이다.   옆 골목 호은종택이 바로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生家)이다. 이 집은 주실마을에 처음들어온 입항조 조전(趙佺)의 둘째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때 지은집이라고 소개돼 있다.   당시 호은종택에 사는 조씨를 가리켜 칼날같은 남인(南人) 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렸으며, 일제강점기때도 끝까지 창씨계명을 하지 않은 지조있는 마을로 지금까지 칭송이 드높다고 한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조상들의 대쪽같은 선비정신, 그 올곧음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때문이 아닐까.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호은종택 마당에 들어서니 따스한 영양의 햇살과 산들바람이 먼저 나그네를 맞는다. 발목아래 서걱거리는 자갈소리. 주인은 없지만 포근한 인심은 남아있는 듯 빈집의 허전함이 없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문화유산이지만 지금도 누군가 방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할 듯 아늑함이 배어있다.      생가에서 바라본 문필봉   그가 앉았을 툇마루에서 앞산을 바라본다. 풍수가들이 집앞 안산에 놓인 봉우리들이 전형적인 ‘문필봉’이여서 조지훈이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 붓끝처럼 봉긋 솟은 저 앞산을 바라본다.   산은 그에게 무엇을 보여줬을까. 구름은 그에게 어떤 행로를 보여줬을까. 이 산간오지 마을에서 자란 그가 어떻게 한국문학사의 거장이 되었을까. 일제와 독재의 암울한 시대에 그는 어떻게 변절하지 않고 순수문학과 민족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을까.   집 뒤로 오래된 감나무가 고목처럼 서있다. 아무래도 그가 어릴때 심었음직한 나무인 듯, 겹 껍질이 세월의 풍상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생명의 소리. 감나무는 주인을 대신해 홀로 생명의 지조를 지키고 서 있는 듯하다   조지훈 문학관    호은종택에서 1백여m 거리에 그의 삶과 문학, 지조의 일생을 담은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입구에서 나그네를 단숨에 잡는 것은 그의 시 승무(僧舞).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근대 대한민국의 대표시 승무가 인사를 한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라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중략)」    이 처절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의 아프도록 순수한 서정과 청아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 자리에 서서 동탁의 그날 밤을 그려보니 답이 나왔다. 바로 이곳, 영양이 그를 빚었다. 하늘아래 첫 동네, 청정한 하늘과 백두대간의 숲에서 나오는 산소바람, 그리고 기름진 땅과 별들의 속삭임.   조지훈의 발자취는 격동의 역사, 그 파도에 맞서온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틈틈이 서구학문을 탐독하던 그는 1939년 약관 19세의 나이에 시인 정지용에 의해 그의 시 「고풍의상」이 “문장”지에 추천되면서 등단하게 됐다.     이후 한국민족시를 대표하는 ‘승무’와 ‘낙화’ ‘ ‘고사’와 같은 명시를 포함, 박목월, 박두진과 활동하면서 엮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앞에서’ ‘여운’ 등 수많은 보석같은 시집을 역사앞에 내놓았다.   시인이자 문학가, 역사학자로서의 삶이 그의 발자취라면 그의 ‘지조론’은 민족과 겨레를 향한 그의 양심이자 생(生)의 지표였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시인 조지훈이 평생을 두고 지켜온 지조적 삶을 엮은 논설집 “지조론”에서 그가 말한 내용이다. 6.25 전쟁후인 1950년대 후반, 자유당 정부시대의 혼탁한 정치환경과 지도자들의 변절을 본 그가 세태를 비판한 송곳같은 글이다.      주실마을 입구전경   격랑의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수한 서정과 민족정신, 대쪽같은 지조를 지켜온 그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가 말했던 시대의 변절자들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것인가. 세월은 가고, 강물은 흘렀지만 새로운 변절자들과 시대의 야바위꾼들은 또 어둠속에서 그들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어쩔수 없는 세상의 운명인가.   지금 이 시대, 삶이 뿌리채 흔들리는 이 혼탁한 세상에 강력한 순수성으로, 뜨거운 민족정신으로, 한밤에 추는 승무앞에서 용솟음치는 처절한 슬픔처럼 시대의 양심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조지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 기획특집
    • 사람과 인문학
    201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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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객원칼럼〉주말 영양사용설명서
        2022년(壬寅年) 새해가 밝았지만 3년째 이어오는 코로나19는 우리네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 이제는 대면과 비대면의 소통과 양자 간의 균형에 맞춘 새로운 페러다임의 구축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른바 대면과 비대면으로 각자의 소통 역할은 물론 교류하는 인간(homo communicans) 즉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과 희망을 계획하며 신년의 포부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상실감과 정서적 우울감이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소통과 공감이라는 것이 타인과 세상을 보살피는 따뜻한 힘이지만, 과도하게 짊어지게 되면 마음이 지쳐 자기 번아웃(burnout·극도의 정신적 피로나 무기력)이 찾아올 수 있다. 특히, 합리적 결정과 조언이 흔들려 타인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문화가 주는 정서적 안정, 지적소유와 힐링의 포인트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문향의 고장 영양군이 주는 다양한 문화공간은 역사적으로 위엄이 강하며 시대정신이나 문학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맑은 밤하늘의 별빛을 수놓은 아시아 최초 국제 밤하늘 보호공원, 죽파리 자작나무숲길, 선바위 관광지등 자연의 신비로움을 비롯해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 산촌박물관, 조지훈문학관, 오일도 시비공원, 이문열문학관이 조성되고 있어 문향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부족함이 없다.     영양군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시인인 승무의 저자 조지훈(1920~1968)선생의 지훈문학관이 주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주실마을 북쪽에는 일월산(日月山)이 있고 그 옆으로는 문필봉(文筆峰)과 연적봉(硯滴峰), 노적봉(露積峰) 등 해발 200m 높이의 봉우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반변천이 흐른다.   마을 입구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조성된 ‘주실쑤’라는 울창한 숲이 있다.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심어 오늘날까지 가꾸어 온 것으로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 혹은 ‘생명의 아름다운 숲’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필봉은 말 그대로 붓을 닮아 뾰족한 삼각형 모양을 띄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봉우리로 문필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학자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며 실제로 조동원박사, 조동길교수, 국문학자였던 조지훈교수 등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지훈문학관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소신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의연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청록파시인으로 일반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4.19혁명의 불꽃을 지피고 추상같은 질책으로 지조 있는 삶을 외친 논객이요, 한국의 민족문화사를 재정립한 민속학자라는 사실과 일제 강점기 이후 험난한 역사적 현실아래 선비의 지조와 열정을 지니고 살아온 삶을 통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인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학습의 공간이며, 주실마을과 문학관을 탐방하며 자신을 한번쯤 돌아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 추천하고 싶다.   지훈시공원은 주실마을의 뒤편에 조성되어 둘레 길처럼 걸으며 시를 읊고 심신의 안정과 한옥들의 고즈넉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시인이 된 듯 지훈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빛을 찾아가는 길  - 조 지훈 - 사슴이랑 이리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가는 내 눈동자는 紫雲(자운) 피어나는 靑銅(청동)의 香爐(향로) 동해 동녘바다에 해 떠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리.      조지훈이 가졌던 선비로서의 품격과 빛을 찾아가는 삶의 발자취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말라는 선대로부터의 대물림된 삼불차(三不借)의 가르침이 아닐까. 삼불차의 정신은 주실마을에 세거를 정한 한양 조씨들의 자존심의 발로이자 근대사의 굴곡을 헤치고 빛을 찾아가는 삶의 지표이다.    인생은 어둠속에도 광명한 빛을 찾아가는 길이기에 새로운 생각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밝히는 힘이 된다. 좁고 어두웠던 삶이 강한 인내 속에 혹독한 추위마저 이겨냈을 때 비로소 따스한 봄 햇살이 우리 곁으로 찾아와 심장에 물든 새싹들을 푸르게 꽃피우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둠속에서도 광명한 빛을 찾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희망해 본다.  (조지훈문학관장/시인 양 희)        
    • 우리동네 새소식
    • 동정
    202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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